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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유산

디지털 초상화와 법적 인격권 충돌, 누구의 권리가 우선일까

디지털 초상화의 시대, 고인의 인격은 어디까지 보호되는가

 


AI가 고인의 얼굴, 목소리, 말투를 복원해 만든 디지털 초상화는
단순한 콘텐츠가 아니다.
이제 그것은 한 사람의 인격을 가상공간에서 지속적으로 재현하고 상호작용하게 하는 존재로 진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기술이 가능해진 시대에,
고인의 인격권은 사망 이후 어디까지 보호받아야 할까?

현행 한국 민법에는 ‘사후 인격권’에 대한 명확한 조항이 없다.
즉, 사람이 사망한 이후 그 사람의 이미지, 목소리, 스타일, 사상 등이
AI로 복제되어도 그것이 ‘불법’으로 간주되는 범위는 매우 제한적이다.
가족이 직접 AI 초상화를 만들었다 해도,
고인의 생전 동의가 없었고, 복제된 이미지가 고인을 왜곡하거나
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법적 책임을 묻기 어렵다.

이는 곧 ‘기술이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가’라는 철학적 문제를 넘어서
법이 사람의 디지털 흔적을 어디까지 인격으로 간주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지금처럼 고인이 생전에 디지털 재현을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나 플랫폼이 ‘추모’라는 이유로 AI 아바타를 제작할 경우,
이는 사후 인격권의 침해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

특히 메타버스에서 AI 고인이 제3자와 대화하고,
새로운 콘텐츠를 생성하는 수준까지 도달한 지금,
법은 여전히 ‘기억된 사람’을 ‘정보’로만 취급하고 있다.
이에 따라 디지털 초상화가 단지 고인을 기억하는 수단을 넘어서
고인의 삶을 대체하거나 재해석하는 위험까지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유족의 추모 권리 vs. 고인의 사후 권리: 충돌의 딜레마

 

가장 큰 논란은 바로 고인의 ‘사후 인격권’과
유족의 ‘추모할 권리’가 직접 충돌할 때 발생한다.
많은 가족은 “그 사람을 기억하고 싶어서”, “아이에게 남겨주고 싶어서”
라는 이유로 AI 기반 디지털 초상화를 제작하거나 공유한다.
그러나 고인이 생전에 디지털 기술이나 기록 보존에 대해 명확히 반대 의사를 가졌다면,
이 행동은 단순한 추모가 아닌, 사적인 기억의 공개와 인격 복제에 대한 침해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딜레마는 기술의 발전 속도와 사회적·법적 인식의 간극에서 발생한다.
예를 들어, 유족이 부모의 얼굴과 목소리를 AI로 복제해 손주에게
“디지털 할머니”로 남겨주려 할 경우,
아이의 정서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고인의 인격은 의사에 반한 채 ‘상품화된 존재’로 변질될 수 있다.

이 문제의 핵심은 ‘기억과 감정은 누구의 것인가’이다.
유족의 슬픔은 공감받을 권리가 있지만,
그 과정에서 고인의 의사를 무시하는 것은
추모를 가장한 디지털 전시로 오해될 수 있다.
더욱이, 고인이 평생 간직한 가치관이나 신념이
AI에 의해 단순화되거나 잘못 해석될 경우
그 사람의 삶 자체가 왜곡되어 재현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추모를 위한 기술 활용이라 하더라도
사망자의 생전 가치관, 동의 여부, 콘텐츠의 사용 범위 등을
사전에 문서화하고, 가족과 공동 동의하에 운영하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이 정서적 위로와 윤리적 존중 사이의 균형점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와 같은 논쟁은 단순히 가족 내 갈등이나 개인의 감정 문제를 넘어,
사회 전체가 기억을 소비하는 방식의 변화를 반영한다.
특히 디지털 기술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 사이에는
‘기억의 표현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차이가 존재한다.
젊은 세대에게는 디지털 초상화가 감정 표현의 한 방법이지만,
고령층에게는 그 자체가 불편하고 거북한 기술일 수 있다.
만약 고인이 이러한 기술 환경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다면,
그를 디지털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시도는 본인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또한 최근에는 AI 기반 디지털 초상화 서비스가
상업적 상품으로 유통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일부 기업은 유족의 심리를 이용해 ‘고인을 되살려드립니다’라는 감성적인 문구로
고인의 모습과 목소리를 재현하는 유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상품화 흐름 속에서, 디지털 초상화가 단순한 추모를 넘어
감정 소비와 기억의 상업화로 이어질 위험성도 경계해야 한다.

결국 이 문제는 기술의 가능성보다도,
우리가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그 사람의 삶을 존중하는 것이 진정한 추모라면,
기억은 고인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디지털 기술은 그 기억을 보완하거나 전달하는 수단이지,
절대 대체하거나 왜곡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기준 위에서만 유족의 추모 권리와 고인의 사후 권리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

 

 

법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제도화 가능성과 미래 대응

해외에서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한 법적 대응이 시작되고 있다.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Revised Uniform Fiduciary Access to Digital Assets Act (RUFADAA)를 통해
고인의 디지털 자산 접근과 관련한 규제를 마련했고,
유럽은 GDPR 조항을 통해 ‘디지털 존재의 처리와 보존’에 대해
사망자의 권리를 부분적으로 보호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아직 디지털 인격권에 대한 법적 정비가 미흡한 상태다.
디지털 초상화는 여전히 ‘디지털 콘텐츠’로 분류되며,
AI가 고인을 시뮬레이션하더라도 정보통신망법이나 저작권법 수준에서만 제한될 뿐
인격권 또는 기억권에 대한 구체적 보호 장치는 없다.

이제는 고인이 사망 후에도
디지털 공간에서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장치,
즉 ‘디지털 생전 동의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는 개인이 살아 있을 때 자신의 얼굴, 목소리, 콘텐츠가
사망 이후 어떤 방식으로 사용될지 명확히 지정하는 장치로,
디지털 유언장 또는 AI 활용 동의서 형태로 제도화될 수 있다.

또한, AI 초상화 기술을 활용하는 기업과 플랫폼은
고인의 생전 의사 확인을 위한 입증 책임의무를 부담하도록 규정해야 하며,
AI로 복원된 디지털 인격의 범위와 기능도
정해진 윤리 기준과 디지털 추모 가이드라인에 따라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처럼 법제화가 뒤따라야만
AI 기술은 인간의 기억을 존중하고 지킬 수 있는 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다.
사람을 기억하는 도구가 사람을 지워버리는 일이 없도록,
기억은 기술보다 사람 중심의 권리와 감정 위에서 설계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디지털 인격의 활용이 대중화되는 미래에는
단순히 개인의 동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AI 기반 디지털 초상화는 고인의 정체성과 연결된 만큼,
사후 인격권 보호를 위한 국가 차원의 인증 및 관리 체계 마련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생전 작성된 디지털 유언장이나 초상화 이용 동의서를
공공기관 또는 제3자 전문 기관이 검증하고 보관하는 ‘디지털 인격권 등록제’가
도입될 수 있다면, 고인의 권리와 유족의 책임이 보다 명확히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플랫폼 기업 역시 기술 개발 이전에 ‘디지털 인격 처리 책임자’ 또는
‘윤리적 운영 가이드라인’ 제정 등의 사회적 책무를 감당해야 한다.
현재처럼 단지 사용자가 데이터를 제공하고, 기업이 그 데이터를 AI 학습에 활용하는 구조는
사망 이후의 인격과 감정을 상업적 도구로 전락시킬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따라서 기업에는 단순한 개인정보 보호를 넘어,
디지털 인격권 관리에 대한 명확한 설명 의무와 사전 동의 시스템 구축이 필수적이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제도화는 기술의 발전 속도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기술 사용을 가능하게 만드는 전제 조건이다.
기억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이고, 기술은 그 기억을 이어주는 수단일 뿐이다.
그 수단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반드시 법과 윤리, 감정의 언어로 정제되어야 하며,
‘사망 이후에도 존엄한 기억으로 존재할 권리’는 시대가 반드시 보호해야 할 새로운 기본권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디지털 초상화와 법적 인격권 충돌, 누구의 권리가 우선일까


요약 

 


디지털 초상화는 인격적 표현물로, 사후에도 인격권 보호 대상이 되어야 함

유족의 추모 권리와 고인의 권리가 충돌할 수 있으므로, 생전 동의가 필수

현행 한국 법제는 미비하며, 디지털 유언장 + 생전 동의 제도의 정비가 시급

추모는 감정의 자유이지만, 기술을 통한 인격 복제는 반드시 윤리적·법적 통제가 필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