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왜 아직 ‘디지털 유산법’이 없는가?
디지털 자산의 증가, 그러나 법은 아직 ‘오프라인’에 머물다
(디지털 자산, 온라인 계정 상속, 법적 공백)
최근 10년간 우리는 온라인에서 더 많은 자산과 흔적을 남기고 있다. 개인의 소셜미디어 계정, 유튜브 채널, 블로그, 클라우드에 저장된 문서와 사진, 암호화폐 지갑, 온라인 쇼핑몰 포인트, 자동결제 내역 등은 모두 ‘디지털 자산’으로 분류된다. 특히 암호화폐나 유튜브 수익과 같은 경제적 가치가 있는 디지털 자산은 상속세 대상으로까지 논의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아직 ‘디지털 유산’을 포괄적으로 정의하고 보호할 수 있는 독립적인 법령이 존재하지 않는다. 민법이나 정보통신망법, 개인정보보호법 등 일부 관련 법조항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사후 데이터 삭제 요청이나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규정에 그친다. 결과적으로 고인의 디지털 자산을 유족이 법적으로 명확히 상속받을 수 있는 체계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런 법적 공백은 특히 갑작스러운 사고나 젊은 세대의 사망 시 더욱 심각한 문제로 나타난다. 온라인 플랫폼 계정이 정지되거나 삭제되는 경우, 가족은 아무런 자료도 건지지 못하고 고인의 추억과 자산이 함께 사라지게 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디지털 시대에 맞는 법적 장치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주요 국가들의 디지털 유산법 제정 현황
(해외 디지털 상속법, 미국 RUFADAA, 유럽 디지털 유산)
한국은 아직 디지털 유산에 대한 별도 법률이 없지만, 해외에서는 이미 관련 법이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RUFADAA(Revised Uniform Fiduciary Access to Digital Assets Act)**이다. 이 법은 유산관리인이 고인의 디지털 자산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며, 고인이 생전에 동의한 경우 이메일, 소셜미디어, 클라우드에 저장된 정보까지도 열람이 가능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유럽연합(EU)도 GDPR(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을 통해 사망자의 데이터 보호 및 상속 처리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있으며,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은 개별적으로 디지털 유산 처리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놓았다. 특히 독일에서는 실제로 사망한 페이스북 사용자의 계정을 유족이 상속할 수 있도록 판결이 내려진 바 있다.
일본 역시 최근 몇 년 사이 ‘디지털 자산 정리 대행 서비스’가 법적 기반 위에서 등장하고 있으며, 일부 지방 정부는 공공기관 차원에서 디지털 유산 정리를 위한 매뉴얼을 제공하고 있다. 이처럼 세계 각국은 디지털 상속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제도적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관련 입법 논의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한국에서 디지털 유산법이 제정되지 못하는 이유
(입법 지연 사유, 사생활 침해 논란, 기술 이해 부족)
한국에서 디지털 유산법이 제정되지 못하고 있는 데에는 몇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첫 번째는 개인정보보호에 대한 민감성이다. 국내 개인정보보호법은 세계적으로도 강력한 수준인데, 이로 인해 고인의 계정에 유족이 접근하는 것이 ‘사생활 침해’로 해석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실제로 일부 플랫폼은 유족이 요청하더라도, 고인의 사전 동의 없이는 계정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 이유는 기술에 대한 국회의 이해 부족이다. 디지털 유산은 단순한 파일이나 이메일이 아니라, 다양한 플랫폼에 흩어져 있는 복합적인 정보 체계다. 이를 법률적으로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상속의 범위는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 누가 우선권을 갖는가 등의 문제가 법적으로 명확하지 않다. 입법을 위해서는 관련 기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현실에 맞춘 유연한 조항 설계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디지털 자산을 포함한 상속 시스템 전반에 대한 사회적 논의 부족도 원인이다. 한국은 아직까지 전통적인 유산 개념에 머물러 있으며, ‘온라인 계정도 자산이다’라는 인식이 일반화되지 않았다. 특히 암호화폐나 유튜브 수익 같은 새로운 형태의 수익 구조에 대한 세법이나 상속법의 해석도 일관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법률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국회 차원의 집중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앞으로 필요한 방향: 법 제정과 국민 인식 전환
(디지털 유산 법제화, 국민 공감대 형성, 제도적 준비)
디지털 유산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의 영역이다. 고인의 사진, 영상, 업무자료, 수익 정보가 모두 디지털 형태로 남겨진 지금, 이들을 보호하고 다음 세대에 안전하게 전달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 마련이 시급하다.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를 넘어서, 인간의 삶과 죽음, 추억과 기록을 다루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포괄적 디지털 유산법의 제정이다. 디지털 자산을 명확히 정의하고, 상속 범위와 절차, 유족의 접근 권한 등을 규정하는 독립적인 법률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 법은 개인정보 보호와 상속인의 권리를 균형 있게 보장해야 하며, 각 플랫폼과 연계된 실무 지침까지도 포함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국민의 인식 전환도 필요하다. ‘디지털 유언장’이라는 개념을 널리 알리고, 누구나 자신의 계정과 자산을 미리 정리할 수 있도록 교육과 캠페인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 고령층뿐 아니라, 20~30대 1인 창작자, 프리랜서, 자영업자들도 디지털 유산을 남기게 되는 시대이므로, 개인 차원의 사전 준비가 제도화와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한국이 디지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기술과 법, 시민의식이 함께 발전해야 한다. 더 이상 유산은 금고 속 문서나 통장만이 아니다. 계정 하나, 영상 하나, 클라우드 폴더 하나가 유산이 되는 시대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자산’을 법과 제도로 보호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