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는 어떻게 관리할까? 미국과 일본의 디지털 상속법
디지털 자산 상속의 기준을 만든 나라, 미국
미국은 전 세계에서 디지털 자산을 법적 유산의 범주에 포함시키려는 시도를 가장 먼저 제도화한 나라 중 하나다. 2010년대 초반부터 사회적으로 논의가 시작됐으며, 2015년에는 미국 변호사 협회 산하 Uniform Law Commission이 디지털 자산의 상속과 접근을 명문화하기 위해 RUFADAA(Revised Uniform Fiduciary Access to Digital Assets Act)라는 모델 법안을 발표했다.
이 법률의 가장 큰 특징은, 디지털 자산을 단순한 '비공식 정보'가 아니라 정식 유산의 일환으로 인정한다는 점이다. RUFADAA는 각 주(state)의 입법 기관에 의해 자율적으로 채택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2025년 현재 미국의 50개 주 중 46개 주 이상이 이 모델 법률을 도입하여 각 주 법률에 반영하고 있다. 이는 그만큼 디지털 자산의 중요성과 상속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미국 내에서 빠르게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RUFADAA는 고인이 생전에 남긴 유언장(Wills), 생전위임장(Powers of Attorney), 또는 신탁 계약(Trusts) 등을 바탕으로, 상속자가 디지털 자산에 접근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인정한다. 예를 들어 고인이 "내 구글 계정의 데이터는 배우자에게 넘긴다"는 조항을 남겼다면, 상속인은 합법적으로 해당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된다.
단, 이러한 권한은 고인이 생전에 플랫폼 이용약관에 따라 사전 동의를 명시했는지 여부에 따라 제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부 SNS 플랫폼에서는 생전에 사용자 본인이 상속 설정을 하지 않은 경우, 외부인이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는 약관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상속자는 법원 명령서, 사망 증명서, 신분증 사본 등 법적 서류를 준비해야만 접근 절차가 가능하다.
특히 미국은 개인 정보 보호법(Privacy Law)과 상속권 보호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매우 정교한 법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고인의 디지털 자산을 상속인이 무조건 열람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보다는, 고인이 생전에 남긴 구체적인 동의 여부와 법적 서류를 근거로 판단하는 것이다. 이는 무분별한 정보 노출을 막고,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사후에도 존중하려는 목적이다.
또한 미국에서는 이메일 서비스, 클라우드 저장소, 스트리밍 구독권, 암호화폐, 온라인 결제 서비스 등 다양한 종류의 디지털 자산을 유산 목록에 포함시키는 것이 보편적인 추세다. 특히 암호화폐의 경우, 개인 키가 없다면 복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RUFADAA는 이러한 디지털 자산의 존재와 접근 방식까지 유언장에 명시할 수 있도록 권장하고 있다.
이러한 법제도적 기반 덕분에 미국의 상속인들은 디지털 자산을 보다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반면 아직 관련 제도가 미비한 다른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고인의 온라인 자산이 사망 이후에도 사회적 가치나 경제적 가치를 유지하며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요약하자면, 미국은 디지털 유산에 대한 명확한 법적 정의와 절차를 마련함으로써, 생전의 자율성과 사후의 질서를 동시에 확보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국이나 일본 등 다른 국가들이 디지털 상속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RUFADAA의 도입 배경과 운영 방식은 매우 유의미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일본의 현실적인 접근, ‘디지털 정리 생전 준비’ 문화
일본은 미국과 달리 ‘법률 중심’보다는 개인의 사전 준비를 강조하는 문화적인 접근이 두드러진다. 일본에서는 고령화 사회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사망 이후 디지털 자산이 처리되지 않아 문제가 되는 사례가 급증했고, 이로 인해 '生前整理(세이젠 세이리, 생전 정리)'라는 개념이 사회 전반에 자리잡게 되었다.
‘생전 정리’는 단순히 물리적인 물건을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온라인 계정, 디지털 기기, 이메일, 클라우드 저장소, SNS 계정, 암호화폐 지갑까지 정리의 범위를 확장한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디지털 유산을 정리해주는 민간 서비스가 다양하게 운영되고 있다. 유료 서비스는 물론이고,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도 디지털 생전 정리 안내서를 배포하거나 교육을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
법률적으로는 일본 민법이 디지털 자산을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망자의 유산에 포함된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대부분의 온라인 플랫폼이 이용자의 생전 동의 없이 계정 접근을 금지하고 있어, 유족이 고인의 디지털 자산에 접근하려면 생전 정리가 필수적이라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예컨대, 암호화폐 거래소의 경우 접근 키가 없으면 그 자산은 사실상 '영구 잠금'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차이점: 미국은 법제도 중심, 일본은 실용적 가이드 중심
미국과 일본은 디지털 상속에 접근하는 방식이 매우 다르다. 미국은 철저히 법 제도 중심으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생전에 작성된 유언장, 신탁 계약, 위임장 등을 바탕으로 디지털 자산에 대한 법적 권한을 상속자에게 부여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놓았다. 주 정부마다 세부 운영 방식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법률적 테두리 안에서 디지털 자산도 부동산이나 금융자산처럼 정식 유산의 일종으로 다룬다.
반면 일본은 디지털 자산을 제도적으로 강제하려는 시도보다는, 시민의 자발적 준비와 민간 기업의 참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많은 일본인이 ‘디지털 유언장’을 개인적으로 작성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엑셀이나 전용 앱을 통해 계정 정보를 정리하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다. 일본에서 출간된 “디지털 생전정리 노트”는 실제로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이처럼 미국은 법률이 우선이고 실무가 따라간다면, 일본은 실무가 먼저이고 법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러 있다. 어떤 방식이 더 우월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각각의 사회가 디지털 시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준비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이 참고해야 할 시사점과 제언
한국은 아직 디지털 자산 상속에 대해 구체적인 법률이나 사회적 합의가 없는 상태다. 그 결과, 고인이 남긴 이메일이나 클라우드 자료조차 유족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해외의 사례는 한국 사회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특히 미국의 RUFADAA처럼 국가 차원의 입법을 통해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면서도 유족의 접근을 보장하는 시스템은 충분히 검토해 볼 가치가 있다.
반면, 일본처럼 생전에 개인이 스스로 정보를 정리하고 가족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돕는 정책도 효과적일 수 있다. 예컨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디지털 유언장 가이드라인을 제작해 보급하거나, 클라우드나 암호화폐에 대한 상속 시나리오를 소개하는 공공 교육이 진행된다면 국민 인식 전환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디지털 자산도 결국 ‘사람이 남기는 흔적’이라는 점을 사회가 인정하고, 이를 제도와 문화 안에서 안전하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이 빠르게 발전할수록, 사후 디지털 자산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일부 전문가만의 논의로 끝날 수 없다. 한국도 해외 사례를 참고하여 실질적인 변화와 입법을 준비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