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 서명(Multi-Sig) 지갑이란 무엇인가?
암호화폐를 보관하는 방식은 개인 키 하나로 지갑을 관리하는 단일 서명(Single Signature) 방식이 주류였지만, 보안과 분산된 통제를 위해 다중 서명(Multi-Signature, 이하 멀티시그) 방식의 지갑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 방식은 한 명이 아닌 두 명 이상이 서명을 해야만 거래가 승인되는 구조로, “2-of-3”, “3-of-5”와 같은 형태가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3명의 키 보유자 중 2명이 서명하면 출금이 가능한 방식은 "2-of-3 멀티시그"로 불린다. 이 시스템은 개인 키 하나가 유출되거나 분실되더라도 전체 자산이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방지해준다. 기업, DAO(탈중앙화 자율조직), 고액 투자자들이 선호하는 방식이지만, 개인 투자자 중에서도 사망 이후를 고려해 가족과 멀티시그 지갑을 구성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멀티시그 지갑은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상속되지 않는다. 서명 구조 자체가 사망자 1인의 키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면, 그 키를 복구하지 못할 경우 영구적으로 자산 접근이 차단될 수 있다. 즉, 멀티시그는 보안에는 탁월하지만, 상속과 같은 인간적인 변수에는 매우 취약할 수 있다.
사망자 키 보유 시 발생하는 실제 문제들
현실에서는 고인의 키가 멀티시그 구성원 중 하나였던 경우, 그 사망으로 인해 전체 지갑 운영에 막대한 지장이 생기는 사례가 속속 보고되고 있다. 특히 “2-of-3”과 같은 구조에서는 고인이 사망함으로써 남은 두 명 중 한 명이 더 이상 키를 사용할 수 없다면, 사실상 자산이 봉인되는 구조가 된다.
2021년, 실제 한 국내 투자자 가족은 사망한 고인의 멀티시그 지갑에 약 15억 원 상당의 이더리움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키 소유자가 사망하여 서명 구조를 충족할 수 없어 자산을 잃는 사례를 경험했다. 해당 지갑은 하드웨어 디바이스와 종이 지갑에 나누어 백업되어 있었지만, 고인이 분산 저장한 위치 정보를 남기지 않아 복구가 불가능했다.
또한 공동 서명자 중 한 명이 고인과의 관계가 단절된 지인, 혹은 해외에 거주하는 인물인 경우, 해당 사람과의 연락 두절로 인해 남은 가족이 지갑 접근을 시도할 수 있는 방법 자체가 봉쇄된다. 이는 단일 서명 지갑과는 전혀 다른 위험 구조이며, 멀티시그 지갑의 구조적 장점이 상속 상황에서는 오히려 ‘결정적 단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생전부터 준비해야 할 다중 서명 상속 설계
멀티시그 지갑이 사망 이후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는 생전부터 구조를 정교하게 설계하는 것이 필수다. 가장 이상적인 구성은 신뢰할 수 있는 복수의 가족 구성원 + 법적 대리인 + 비상 키 보관인(예: 변호사나 공증인)으로 지갑 서명 권한을 분산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3-of-5” 구조로 지갑을 만들 경우, 본인과 배우자, 자녀 1인,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지인이나 법무법인에 키를 분산시켜 보관하는 것이 좋다. 이때 주의할 점은, 각 키 소유자에게 반드시 ‘역할 설명’과 함께 사망 시 행동 가이드라인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키를 나눠주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사망이 발생했을 경우 어떤 순서로 어떤 키를 활용해 서명을 시도할 것인지, 그리고 누가 최종 수령자가 될 것인지에 대한 디지털 유언장 또는 별도 문서화된 안내가 있어야 한다.
또한 최근에는 비상 복구 키(Emergency Recovery Key)를 만들어 클라우드 기반 암호화 스토리지에 저장하고, 비활성 계정 관리자 기능을 통해 사망 후 자동 전달되도록 설정하는 방식도 사용된다. 이 방식은 일반 키가 아닌 복구용으로 사용되며, 멀티시그 중 하나의 키 역할을 대신하도록 설계할 수 있다.
공동 서명자 사망 시 법적 처리 절차는 어떻게?
만약 고인이 멀티시그 키의 일부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 키가 사망 후 사용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법적으로도 상당히 복잡한 해석이 필요해진다. 현재 한국에는 멀티시그 지갑에 대한 상속 관련 법률이 명확히 존재하지 않으며, 민법상 유산 분할 규정과 디지털 자산 해석이 불분명하다.
다만, 고인의 사망 사실을 증명하고 유언장 또는 상속 계약서에 따라 해당 지갑 키에 대한 권리를 명확히 주장할 수 있다면, 다른 공동 서명자들과 함께 공증된 상속 협의서를 작성해 거래소나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직접 증빙할 수 있는 방법도 존재한다. 이 경우, 법원의 유산 분할 결정문, 사망 진단서, 가족관계증명서, 유언장 원본 또는 공증 사본 등이 필수적으로 요구될 수 있다.
또한, 블록체인 프로토콜에 따라 다르지만 일부 DAO나 지갑 플랫폼에서는 “비상 절차 또는 서명자 교체 기능”을 사전에 등록해 두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법률적으로는 상속인들이 이 기능을 이용할 수 있도록 사망 전에 명확히 등록된 상태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유족은 실질적으로 자산이 있다는 사실만 알고, 영구히 접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멀티시그 시대의 ‘디지털 상속 전략’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암호화폐 자산이 단순한 투자 수단을 넘어서 고액 자산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는 지금, 멀티시그 지갑도 자연스럽게 일반 투자자들에게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다중 서명이 가져오는 보안성과 안전성은, 동시에 상속이라는 영역에서 ‘복잡성과 폐쇄성’이라는 양날의 검이 된다.
이제는 단순히 비밀번호나 개인 키를 어딘가에 적어두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디지털 자산을 안전하게 상속하기 위해서는 멀티시그 구성 단계에서부터 법률적·심리적 요인까지 고려한 설계가 필요하다. 누구와 키를 나눌 것인지, 만약의 경우 대체 서명자를 설정할 수 있는지, 그리고 유족에게 그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넘길 것인지에 대한 계획이 없다면, 해당 자산은 생전의 가치와는 무관하게 ‘디지털 사망’ 상태에 빠질 수 있다.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암호화폐 사용자들이 반드시 디지털 유언장을 통해 멀티시그 지갑 구조와 키 분배 상황, 사망 시 대처방안까지 정리해 둘 시점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디지털 유산 정리’이며, 자산을 지키는 동시에 가족에게 고통을 남기지 않는 준비가 된다.
정리
멀티시그 지갑은 보안성은 높지만, 상속에서는 복잡성을 유발함
고인의 키 소유로 인해 전체 자산 접근이 불가능해지는 사례가 존재함
생전부터 복수 서명자 구성 및 비상 키 설계가 필수
법적 서류 및 디지털 유언장을 통한 증명 체계 확보 필요
멀티시그 지갑의 상속을 고려한 ‘디지털 상속 전략’이 필요한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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